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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맛으로 집안을 구분하던 시절의 된장 간장 이야기

by 알쓸정보엄마 2025. 8. 14.

오늘날 된장과 간장은 대형 마트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상품이 되었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이 장류들은 집집마다 직접 담가 먹는 것이 당연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시절 된장과 간장은 단순히 요리의 재료가 아니라, 한 집안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장맛을 보면 그 집이 어떤 손맛을 이어왔는지,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지, 얼마나 부지런한지까지 알 수 있었습니다. 장맛은 한 해의 노동과 기다림, 그리고 가족의 손길이 고스란히 녹아든 결과물로, 다른 음식과 달리 계절과 시간,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깊게 배어 있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장맛이 집안의 개성을 대표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살펴보고, 그 장맛이 만들어지는 과정, 사라져가는 이유, 그리고 지역별 전통 장맛의 특징까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장맛으로 집안을 구분하던 시절의 된장·간장 이야기

1. 장맛이 만든 집안의 정체성


옛날에는 매년 초봄, 대체로 음력 정월이 지나고 날이 풀리면 장을 담그는 ‘장 담그기 날’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끼리 날짜를 맞춰 함께 준비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이때 담근 장은 그해와 다음 해까지 먹을 귀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장맛을 좌우하는 요소는 매우 다양했습니다. 콩의 품종과 상태, 메주를 띄우는 온도와 기간, 소금의 질과 양, 장독대가 놓인 위치와 햇볕이 드는 각도, 통풍 상태 등 모든 환경이 맛을 결정했습니다.

이렇듯 장맛은 그 집안의 생활 환경과 부지런함을 고스란히 드러냈습니다. 같은 마을에 살아도 어떤 집 된장은 구수하고 진하며, 또 어떤 집 간장은 색이 연하지만 단맛이 은근히 배어 있었습니다. 손님이 찾아와 국이나 찌개를 맛보면 “아, 이건 ○○댁 된장 맛이네” 하고 바로 알아맞히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시집간 며느리가 친정집 장맛을 그리워해 장독을 가져오거나, 명절이면 장맛 좋다는 집의 된장과 간장을 얻어가는 풍경도 일상이었습니다. 장맛은 곧 그 집안의 품격이자 자존심이었고, 마을 공동체 안에서의 평판을 결정짓는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2. 세월과 정성이 만든 깊은 맛


장맛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먼저 메주를 만들기 위해 콩을 삶아 찧고 네모난 틀에 넣어 모양을 잡습니다. 이후 이를 따뜻한 아랫목에서 발효시키는데, 이 시기에는 곰팡이가 잘 피어야 하므로 온도와 습도를 세심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발효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바람과 햇볕이 잘 드는 곳에 걸어 말리며, 자연스럽게 미생물이 자리 잡게 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메주를 장독에 담고, 굵은 소금을 풀어 만든 소금물과 함께 넣어 숙성을 시작합니다. 장독대는 대개 마당 한쪽, 햇볕이 잘 들고 비가 직접 닿지 않는 곳에 두었습니다. 숙성 기간 동안에는 뚜껑을 열어 햇볕을 쬐게 하고, 장마철에는 비에 젖지 않도록 덮어 주며 관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된장은 점점 구수하고 깊어졌으며, 간장은 맑고 진하게 색을 입었습니다.

장맛이 좋다는 평을 듣기 위해서는 한 해, 두 해의 경험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장을 담그는 손길에는 그 집안 여인들의 세월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때로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수하는 방식으로 수십 년간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된장과 간장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한 집안의 역사와 노하우, 그리고 정성의 결정체였습니다.

 

장맛이 사라져 가는 이유와 복원의 필요성


현대에 들어서면서 집집마다 장독대를 두고 장을 담그는 풍경은 점점 사라졌습니다. 도시 생활과 아파트 문화가 확산되면서 마당이 있는 집이 줄었고, 장을 숙성시킬 공간을 마련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또한, 시중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공장 생산 장류는 일정한 맛과 편리함을 제공해 바쁜 현대인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집집마다의 고유한 장맛은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같은 된장찌개라도 집마다 맛이 달라서, 한 끼 식사에도 개성과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량 생산된 장류 덕분에 어디서나 비슷한 맛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또, 장을 담그는 데 필요한 재료와 환경 자체가 변했습니다. 예전처럼 집에서 기른 콩을 쓰는 경우가 드물고, 전통 발효에 필요한 자연 조건을 갖추기 어려워졌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도 일부 농가와 장인들은 여전히 전통 방식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해마다 메주를 쑤고, 장독대에서 장을 숙성시키며, 장맛을 다음 세대에 전하려 노력합니다. 최근에는 장 담그기 체험 프로그램이나 전통 장류 교육이 늘어나면서, 잊혀져 가던 장맛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옛날 음식을 재현하는 것을 넘어, 한 지역과 가문의 문화, 나아가 우리 식문화의 뿌리를 지키는 일입니다.

 

3. 지역별 전통 장맛의 특징


우리나라의 전통 장맛은 지역의 기후와 환경, 재료 수급 방식에 따라 뚜렷하게 구분됩니다 경기도 지역은 비교적 온화한 기후와 넓은 농토 덕분에 콩 품질이 좋고, 발효 조건이 안정적입니다. 된장은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특징이고, 간장은 색이 연한 편이지만 감칠맛이 뛰어납니다. 충청도 장은 소금 간이 적당해 짜지 않고 부드러워, 나물무침이나 찌개에 잘 어울렸습니다.강원도는 겨울이 길고 추워 발효가 천천히 진행됩니다. 이 때문에 된장 맛이 깊고 구수하며, 간장은 진하고 짠맛이 강합니다. 산간 지역 특성상 저장 식품으로서 장류의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염도가 높은 편입니다.

전라도의 맛은 진하고 깊으면서도 감칠맛이 풍부합니다. 해산물 발효 식품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아, 간장도 구수함 속에 달큰한 맛이 배어 있습니다. 된장은 대체로 농후하고 찌개나 조림에 잘 어울립니다.경상도는 여름이 덥고 습해 발효 속도가 빠른 편입니다. 이 때문에 장맛이 강하고 진하며, 간장도 짠맛이 뚜렷합니다. 특히 멸치젓이나 새우젓 등 젓갈과 함께 쓰는 경우가 많아 바다 향이 더해지는 것이 특징입니다.제주도는 습하고 바람이 강한 해양성 기후로, 장을 담그는 환경이 육지와 다릅니다. 소금 함량이 높고 간장의 짠맛이 강한 편이며, 해산물과 함께 먹기 좋은 장맛이 발달했습니다.

이렇듯 지역별 장맛은 기후와 재료, 발효 환경이 빚어낸 결과물입니다. 같은 재료를 써도 지역과 환경에 따라 전혀 다른 맛을 내는 것이 전통 장맛의 묘미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아는 것은, 단순히 음식 지식을 넓히는 것을 넘어 각 지역의 생활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